소설 - 어떤 윤곽선 92. 결혼 생활의 예고

 2인전이 끝났다. 중요한 일을 끝낸 후의 빈둥거리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꾸기 싫은 보석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땐 몰랐다. 앞으로 27년 지나야 누리게 될 아까운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나를 부른다. 약혼은 했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냐, 당장 사위를 오라해라.  

 

 복학해서 3학년 끝나가는 나의 '남의편'이 다음 날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금년 안에 식을 올리지 않으면 파혼인줄 알아라.

 

 해서 12월 중순에 날을 잡게 되었다. 남은 시간은 한 달반. 예식장은 시댁 쪽 집안에서 자주 식을 올린다는 덕수궁 근처에 있던 교회. 내가 좋아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그덕 소리 나는 목조 건물.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대조적인 목사님 사무실과 책상에 올려놓았던 모던한 반원 모양의 커다란 투명 유리판이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새어머니 눈치가 보였는지 사위에게 조용히 치루자며 함은 혼자 들고 오라고 했다. 당시엔 함진아비들 함 사세요! 소리가 동네마다 심심챦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전통 함이 아니라 여행용 가방을 혼자 들고 왔다. 열어보니 내가 손수 구입해서 보내드렸던 시아버님을 위한 예단인 양복감이 함께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알 수 없는 새어머니의 복잡 야릇한 행동 때문에 내공이 오를 때까지 올라 있었나, 나 혼자 놀라는 것으로 덮기로 했다. 

 

 결혼식 당일 신부화장 하러 가야하는데 식구 중엔 가줄 사람이 없다. 학교 앞 미용실에 혼자 갔다. 택시에서 혼자 내리는 나를 교회 앞에서 보게 된 중2 때 친구 '일반화'는, 혼자야? 혼자였다면 알렸어야지 화를 냈다. 그런 친구가 고마웠다.

 

 미용실은 방학인데다 오전 중이라 사람이 없었다. 올린 머리 해주세요. 화장은 가볍게 해주세요. 올린 머리가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어차피 면사포를 쓰면 안보일 머리. 미리 알았더라면 그냥 깔끔하게 다듬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사은회 가세요? 난 그저 웃었다. 미용사의 성이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난다. 명 씨. 

 

 연한 회색이긴 했지만 결혼하는 날 그런 색을 입는 신부도 있나? '스프링' 언니 따라가서 구입했던 내 생애 통틀어 최고급 투피스였다. 그 의상실에는 분홍색이 없었다. 있었어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식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행복감보다는 결혼 후 앞날에 대한 불안이 나를 엄습하고 있었다. 코트도 연회색을 구입했다. 왠지 끌려서 멋있어서 골랐다.

 

 회색은 모든 색과 잘 어울리는 색이다. 그땐 몰랐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나 관계를 잘 맺고 싶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라는 것은. 나 역시 그래서 골랐던 건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부정적인 면을 그린 회색인이 등장한다. 무개성, 무감성, 기계적 일사불란한 수동성. 그런 측면을 감수하려는 심리적인 요인도 어느 정도 조금은 많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투피스는 무척 마음에 드는데 가격 때문에 망설이자, 괜챦어, 사! 했던 '스프링' 언니는 서양 고전 음악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최고의 맛과 멋과 재미를 잘 알고 잘 누리는 사람이다. 이 언니가 유난히 좋아하는 색은 청록색이다. 이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술 애호가이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같은 예술가는 누리긴 누리지만 청록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리듯 마음 편히 누리지 못한다. 누리긴 누리지만 무겁게 누린다. 굳이 아무도 가지 않는 외딴 길을 찾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고통에 가까운 방황을 엄청나게 누린다.

 

 

*

 

 

 시댁에 들어가 살기 때문에 가구는 옷장과 책상을 겸할 식탁을 구입했다. 대학원 두 학기를 등록할 수 있는 거금을 치러주는 아버지. 한복과 이불은 새어머니와 함께 가서 맞췄다. 인사동 끝에서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 고급 주단 집이 포진해 있었다. 새어머니나 나나 인사동파다. 인사동 끝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갔다. 가구는 아깝지 않았는데 굳이 이런 집에서 비싸게 사야하나, 친엄마 같았으면 남대문이나 광장 시장에 가서 깔끔한 걸로 사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달라고 했을 것 같다. 베갯잇에 수가 놓인 베개는 생각 보다 비싸 고르지 않았다. (베개는 시장에서 사야지.) 가게 주인이 신랑 팔 베고 잠잘 거냐 놀린다. 새어머니는 깜빡 잊었다며 고르란다. 그래서 샀다. 대학원 두 학기를 등록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대학원 등록금 때문에 쩔쩔 맸던 일이 허무하게 맥 빠지게 느껴진다. 지금.

 

 그렇게 비싼 집에서 한복과 이불을 사준 새어머니가 내게 싸준 냄비 세트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새어머니가 교사생활하면서 학교에서 개근상으로 탄 상품이었는데 운동장에서 떨어뜨렸다던 그 냄비 세트였다. 제일 바깥쪽 큰 냄비가 찌그러져 있는. 그런 걸 왜 싸줬을까? 자꾸만 한복과 이불은 진심이 아니고 냄비 세트가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

 

 

 결혼식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서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올라왔다. 모두 하나 같이 새까맣고 뚝뚝한, 큰 아버지, 큰 고모....... 축의금을 한 집 당 두 봉투씩, 그 중 한 묶음은 아버지, 나머지는 내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아버지 들으라고 큰 목소리로, 큰 고모가 쥐어주신다. 축의금이 새어머니 손에 들어가면 끝나버릴 것 같아서? 어쨌거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웠다. 그 축의금이 없었으면 신혼시절 곤란할 뻔 했다. 

 

 친척들 때문에 내 어린 동생은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 한 동안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고 했다. 나랑 동생이 배 다른 자매였다는 것을 동생이 모르고 있었다는 걸 난 몰랐다. 

 

*

 

 

 나보다 두 달 먼저 결혼식을 올렸던 '스프링' 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베일은 언니 친구이자 내 중학교 때 미술반 선배 '악자' 언니의 것을 빌려서 썼다. 교회에는 따로 대기실이 없었다. 유아 예배 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없게 친구들이 몸으로 가려줘 거울도 없이 불편하게 갈아입었다. 화장도 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레스도 면사포도 모두. 난 전통 한국식으로 하고 싶었는데, 세상일은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 쯤 어릴 때 터득해버렸으니 그러려니 했었다. 준비 끝나고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는데 아버지가 지나다가 나를 보더니 울컥한다.

 

 아버지라고 해서 모두가 가족과 교감을 잘 하는 가족이 모두 행복한 아버지 노릇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상적인 아버지 노릇도 재능이다. 음식 솜씨, 말솜씨, 뭐, 그런 것처럼. 키가 크게 태어나고 작게 태어나는 것처럼. 누군 수영을 잘 하고 누구는 못하는 것처럼. 이 간단한 진리를 알게 된 것은 겨우 몇 해 전이다.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가 나를 때린 것 때문에 줄곧 미워하느라 아버지의 좋은 점을 알면서 애써 흘려보내며 살아왔었다. 아버지는 학자 노릇은 잘 하고 있었다. 몇 년 후 그 대학교에서 전 교수 대상 학술상도 받았다. 가난한 제자들도 잘 돌봤다. 아버지 노릇 빼고 다 잘했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기대했었다. 바위를 보면서 솜사탕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나는 딸 노릇을 잘 했었나? -100점? -100점! 그런 내가 며느리 노릇은 잘 하게 될까? 했을까? -100점? -100점!

 

 주례사 듣는 내내 꼭꼭 꼭꼭 다짐했었다. 나로 인해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신혼여행은 언니 내외랑 함께 갈게요, 했더니 미소 가득한 시아버지. 시댁에서 반대하는 결혼식을 하고 친정에서 살고 있는 '스프링' 언니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설악산으로 갔다. 식도락 부부 언니 네와 달리 나는 걷는 걸 좋아했다. 권금성까지 올라갈 때 보통 운동화 신고도 훨훨 날라 다니는 '남의편'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양보할 수밖에. 아까운 비용을 먹기 위해 물 쓰듯 쓰고 돌아왔다.

 

 

 *

 

 

 내가 ‘남의편’을 배우자로 정했던 건 함께 있으면 편했고 절대로 때리지 않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직접 간접 남자를 처음 볼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가 남을 때리게 생겼나부터 따지게 된다. 전세계가 좋아하는 미남 배우라도 때리게 생긴 사람은 싫다.

 

 결혼식 올리기 전에 약속을 받았었다. 나를 때리는 그날 나는 집을 나갈 거라고. ‘남의편‘과 나는 내가 가출했을 때 만났기 때문에 그럴 것 같아서였는지 엄청나게 많이 싸웠지만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먹던 국그릇을 벽에 내동댕이친 일은 있었지만. 그때 내가 그랬다. 아이구, 무서워 죽겠네, 난 무서운 것 싫어, 다시는 그러지 마. 농담처럼 받아쳤지만, 정말 무서웠다. 다행히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

 

 시어머니 말씀. 너흰 만났다하면 개, 닭 싸우듯 싸우냐. 해가 갈수록 서로 싫어하는 말은 피하게 됐다. 적당히 실속 있게 잔소리 하는 것이 살아가는 요령인 걸 알기까지 10년 쯤 걸렸다.

 

 처음엔 싸울 일이 없었다. 신혼이라서가 아니라 '남의편'이 늘 집에 늦게 들어왔기 때문.


 

*

 

 

 예전 집들, 단열재 개발 전, 겨울 집은 무척 추웠다. 내가 결혼했던 건 12월 중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양말을 두 켤레 신었다. 화장실에 볼 일 보러 들어가면서 슬리퍼를 신는 순간, 그때 느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슬리퍼가 푹 젖어있어 양말이 푹 젖어버렸다. 친정집에서는 슬리퍼를 적셨다면 입구에 세워놓았었다. 무언의 규칙이었다.  다음 사람은 말랐나 안말랐나 확인하면 된다. 그땐 몰랐다. 젖은 슬리퍼는 시집살이 앞날을 한 마디로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혼 생활의 예고편이 또 하나 있었다. 잠간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남의편’이, 난생 처음 내가 고른 책상 겸 식탁에 아무 것도 깔지 않고 종이에 자를 대고 칼로 쓱싹 잘라낸 30cm 넘는 자국이 여러 줄 남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잔소리를 했다. 잔소리 한다고 이미 생겨버린 칼자국은  없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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