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어떤 윤곽선 90. 한 나라가 다른 나

 '주황'이 결혼한 사람은 서울 의대 3학년 때, 제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되었던 고향 친구다. 주동자로 알려졌던 제일교포 동기생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운 나쁘게 엮여 3년 복역하고 나왔다. '주황'이 유학 떠나기 직전인 걸 알고 급하게 청혼했었다. 작년 말, 보도를 통해 제일교포 당사자들의 억울한 세월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조작한 주모자의 '모릅니다.'를 연신 듣게 될 줄은.

 

 모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게 됐다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러다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런 일 조작하기 위해 제일교포를 뽑았던 건가?

 

 나도 대학교 1학년 때 노트 빌려 주다 친해졌던 제일교포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일 당할 뻔했던 건 아니었나, 오싹했다. '모릅니다.'와 같은 장학금을 받았더라면 평생 씼을 수 없는 부끄러운 오점이 될 뻔했구나, 오싹했다.

 

 가출 9개월만에 집으로 돌어갈 계기가 되어준 정보부원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방을 얻을 때 보증금은 계약기간이 한참 남아있다는 이유로 독한 할머니에게 전액 갈취 당하고 말았다. 싸워 봤자 이길 자신이 없어, 잘 잡수시고 잘 사세요. 말해 주고 (물론 마음 속으로.) 나왔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는데 아깝다. 복덕방에 내놓고 다른 세입자를 구하면 중개료만 부담하면 됐는데, 몰랐다.

 

 

*

 

 

 후배 화실에서 나와 '레'에서 지내기 시작할 때 짐을 맡아준 건 '스프링' 언니네 집이었다. 내가 가출하고 얼마 후 '레'에 앉아 있었다. '스프링' 언니가 한 숨을 쉰다. 군대 갔던 동생이 제대할 날이 가까웠다. 같은 방을 써야하는데 불편해졌다. 언니, 참 안됐네요.

 

 언니 동생은 복학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는지 자주 '레'에 나타났었다. 처음 들어섰을 때 인상은...... 저래 가지고 장가 가겠나, 어떤 똘아이가 좋아하겠나. 늘 헤헷, 웃는 상에다 생각하고 행동하기까지 0.1초 밖에 걸리지 않는 행동파였다. 

 

 군인 티를 벗고 짧았던 머리가 자라자 쪼~끔 봐줄만 했다. 손님 없는 '레'에 앉아 여럿이 점심을 같이 먹게 됐다. 헤헤거리며 모두에게 보리차를 따라 옆에 놓아준다. 보리차 한 컵 때문에 내가 그 '어떤 똘아이'가 되버렸다. 결혼문제로 한 달 정도 고민했었다. 평생 가난이 확실하게 보장된 직업. '가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직업' 때문에. 

 

 후배 화실에서 나와 '레'에서 지내기 시작할 때 짐을 맡아 옮겨준 것도 '스프링' 언니가 아니라 언니의 동생이었다. 지금 내 손자의 친할아버지, 지금까지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으로 함께 아웅다웅 살고 있다. 결혼하기로 마음 먹고 나서 친구들에게 알렸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농담 말라며 웃는다. 믿게 하는데 한참 걸렸다.

 

 

*

 

 

 각자 자기 스마트폰으로 통화 할 수 있는 요즘 같으면 약혼 날짜가 훨씬 뒤로 미뤄졌을 지도 모른다. 전화가 거실에 한 대였기 때문에 금방 탄로 나버렸다. 아버지는 전공이 마음에 안들어. 새어머니는 전공이 어때서~. 당연 새어머니 승. 난 애써 아버지를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새어머니가 그런 반응을 보인 마음을 아버지나 나나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성화로 최대한 빨리 부모님만 참석한 상견례 겸 약혼식을 치뤘다. 장소는 학교 앞 까페 빠리. 마주 앉아 식사하는데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소하게 잘 했던 일을 끝 없이 나열한다. 제일 놀랐던 건 나였다. 시어머니는 질세라, 아들 자랑 끊임 없이.

 

 

*

 

 

 논문을 쓰기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아이들 구룹지도 이외의 모든 일, 모든 외출을 중단했다. 묻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논문의 기본 구조에 대해 설명해 준다. 1분도 안되는 짧지만 큰 가르침. 논문이 쉽게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이었다는 걸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알려지기 시작한 마샬 맥루헌의 소통 관련 책과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구입하고 나머지는 모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 낯선 신문방송학과의 서고를 기웃거리며 설랬다. 


 정확한 숫자는 잊었다. 100%의 반의 반 정도였던 것 같다. 언어를 통한 소통의 성공율이 생각보다 낮았다. 표정과 몸짓이 성공율을 조금은 높여준다고 하니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미술과 무용의 기원의 일부를 여기에 둔다고 해도 억지는 아닌 것 같다. 논문 때문에 소통 방식의 역사를 훑었던 것, 의미가 있었고 한 학기 연장한 보람은 분명 있었다.


 논문 제출하러 갔다. 좌우대칭의 추상적인 청동 작품을 주로 하는 조소과 교수 교학과장은 손을 자주 씼었다. 결벽증이 심해 보였다. 당연한 직업병일 지도 모른다. 훗날 동판화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이해했다. 금속이 얼마나 예민한지. 손에 얼마나 많은 이물질이 묻어 있는지. 금속을 다루려면 얼마나 조심을 해야 하는지. 가끔 보도를 통해 귀한 문화재를 맨 손으로 덥석 만지는 장면을 볼 때마다 오싹한다.

 

 질문은 딱 하나. 지도교수에게 지도는 몇 번이나 받았지? 두 번이요. 그럴 줄 알았어. 한숨, 푹~.


 대학교 1학년 때 서양미술사를 배웠던 논문 지도교수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일한다는 이유였는지 정보부의 요주의 인물, 블랙 리스트에 올라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논문 제목을 바꾸라고 해서 바꿨다. 제목이 이상해졌다. 중요한 주제, '소통 방식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았다. 좀 더 우기지 못했던 것 두고두고 후회된다.


 며칠 후 교학과에서 논문이 접수 됐다는 연락이 왔다. 논문 심사 위원장은 프랑스에서 미술사 박사학위와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 있는 평론가 자격증을 취득하고 귀국하자마자 우리 학교에 임용된 나이 많은 독신남 교수. 첫 임무가 내 논문 심사였다. 

 

 심사 당일의 평, 이런 시각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한 물 간 거야. 작가 자신과 양식 자체를 파고들었어야지. 그때는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실력이 없어 그런가 보다 했지만 지금은 동의할 수 없다. 프랑스건 어느 나라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전세계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리고 평하면서 용기를 줄 수는 없었을까. 얼마든지 듣기 좋게 충고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식의 섭섭한 경험은 훗날 학생들 가르칠 때 도움이 많이 됐다. 

 

 대학원은 B가 최하 점수다. 프랑스 기준으로 B였던 평가가 막판에 A로 바뀌었다. 고맙게도 다른 학생 논문 수준 때문. 그 학생은 학교에 잘 나타나지 않아서 작품으로만 아는 선배였다. 묘한 분위기로 단순하게 그린 바다와 새 한 마리가 내 실기실 옆 벽에 걸려있어 지나다닐 때마다 '좋다!' 했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티스토리 툴바